그날 밤엔,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든 채 빗속을 뛰어가거나, 비를 맞지 않을 구름다리 밑에 모여,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지만, 그런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돌아가서 씻지 뭐, 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비가 오는 길을 조심조심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 위로 말그대로 '푸른 밤'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색이 가득찬 숲속에서 찰칵, 사진을 찍었다. 내리는 비와 섞여 사진이 미묘하게 흐리멍텅한듯 뭉그러졌다. 푸른색. 빨간색으로 대표되는 이 날과 정반대의 색이지만, 어쩐지 푸른 밤도 오늘의 이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혀줄, 아니다. 흥분된 마음을 곱게 씻어 가슴 속 어딘가에 잘 간직해줄 빗방울들. 무언가에 맞는 특정한 색깔, 이란건 어쩌면 편견인 것 같다. 그 어떤 색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이 밤. 우리는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새로운 시간 속에 있었지만 현실로 걸어나와서도 여전히 현실이 아닌 곳 속에 있는 것만같은 착각이 들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빛을 쫒는 스카이'같은 기분으로 빛을 따라(라고 쓰고 인파에 휩쓸려....라고 읽는다) 발길을 옮겼다.
있잖아 내가 할말이 있어. 있잖아 내가 너를 생각해.
이만큼 이만큼 이만큼 이만큼 나는 너를 따라가.
그랬다. 너를 따라갔다.
아마도 무엇에 홀린 것처럼, 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한겨울의 너를 만나기 위해서, 한여름에 비행기표를 사고, 호텔을 검색하고, 티켓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긴 가을을 보냈다. 여기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일본 콘서트는 추첨을 통해 표가 배분이 되기 때문에 가고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게 아니다. 추첨, 당첨, 랜덤으로 얻는 자리배분. 내가 내 돈을 내고 만나겠다는데에도 이렇게 어려운 관문들을 거쳐야 한다. 마치 보스맵을 하나하나 깨고 나아가는 용자처럼 조마조마했던 가을을 보냈다. 물론 그 사이에 소녀들의 여러가지 활동을 보고 수없이 많은 화보와, 수없이 많은 방송들을 통해, 그리고 - 어쩌면 조금은 김이 새버렸을지도 모르는 - 한국공연을 관람했다.
한국 공연을 봤는데 왜 또다시 같은 공연을 보러오는가에 대한 이유와 답변은 딱히 할게 없다. "내가 모르는 시간의 너의 모습도 보고싶어서" 정도면 이유가 될까. 매년 평소보다 많은 지출을 해가며 출국을 하고 공연을 보러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단지 그 며칠을 위해서 일년동안 치열하게 살고, 저금을 하고, 매일매일 검색을 하며 기다린 시간들에 대한 단 하루, 364일과 세시간의 교환. 그 역사적인 시간의 교대식이 바로 지금, 이 곳에 있다.
과연 내년에도 나는 비를 맞고 있을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또.
그날 밤에 맞은 비와,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속에서 즐긴 시간과,
너와 함께 보냈던 크리스마스 이브.
범핏범핏! 디딧! 삡삐! 우후우후! 라타타!
- 151224 Phantasia Tour in Saitama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빨간색도 아닌, 일루미네이션의 숲을 장식하고 있던 파란색도 아닌, 수만명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분홍색의 세상 안에 있었다. 귀에서는 렛츠고 소시 렛츠고! 가 울려퍼지고, 주위 사람들의 대화에는 소녀들의 이름이 꼭 들어가 있었다. 바깥에서 어떻게 살았든, 이 안에서는 이름을 수없이 말해도, 끊임없이 노래를 흥얼거려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 우리는 '네가 존재하는 시간'을 산 것이니까.
수없이 많은 콘서트를 가고, 심지어 한달 전에 같은 콘서트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콘서트 직전에 불이 꺼지고 오프닝 영상이 나오기 시작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오프닝은 어떤 모습일까, 전광판에 아이의 얼굴이 잡힐까, 처음 시작하는 일본어 가사가 뭐였더라. 유난히 겨울왕국의 공주들을 보는 것 같은 오프닝이 지나가고, 요란한 싸이렌이 울림과 함께 시작한 You think의 격렬한 무대. 오프닝의 첫 파트는 파니 파트로 시작되었다. 오프닝부터 6곡 정도는 항상 가장 격렬하고 파워풀한 댄싱머신이 되어 메인 무대를 누비며 춤을 춘다. 오프닝의 여신은 단지 오프닝 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가장 극악무도한 댄스를 처음부터 발산하는 소녀들. 사실 한국 콘서트 첫날에 너무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다가 목이 "의도치않은 골룸 코스프레"를 한 전적이 있어서 이번엔 금붕어 모드로. 전체적인 세트리스트는 한국콘과 비슷했지만 일본곡이 있는 버전, 그밖에도 몇개의 노래를 더 번안해서 불렀던 것 같다. 익숙함 속의 낯설음. 한국어 가사도 다 알고 부를 수 있으니까 신난다. 범핏범핏! 디딧! 삡삐! 라타타!
어설픈 아티움 캐릭터였던 영상이 실사 얼굴 버전으로 바뀌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아니 왜 일본에서만? 이런 묘한 질투감이 들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라이언하트, 서장꾸의 크리스마스 셀카 토크 영상에서는 소녀들이 깨알같이 떠들고 노는게 역시 자막으론 한계가 있구나 싶어 조금 우쭐거려지기도 하고. 쉴새없이 심술보가 이리 붙었다 저리붙었다 했다(웃음). 예감에서의 개인 파워댄스샷은 아무리 봐도..아아..내 심장에서 범핏범핏이 샘솟네. 누가 제 눈에 예감 직캠 좀 이식해 주시죠. 아드레날린은 발을 땅에 5초 이상 붙여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 비트에 맞춰 계속 뛰었다. SM의 홀로그램 실력은 왜죠?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번 투어 중 아드레날린 홀로그램은 인정할만 했다. 김태연 나비 날개 영상과 백댄서 홀로그램 처리는 탁월했습니다 SM님(웃음). 남친도 홀로그램으로는 안되나요?(웃음) 아. 미미가 박스에서 개인별로 춤추는 걸로 변경되었는데, 이게 더 디테일이 쩔게 나오는 것 같다. 예전 파파라치 무대같은 표현인데 더 디지털적이고 미래소녀같은 느낌. 파라다이스는 서현-유리 콤비의 꽁냥꽁냥을 보는 재미로 봤던 것 같고, 이번엔 엔딩의 포토박스에서 사진을 많이 찍어서 좋았고, 또...키싱유 악세사리세트가 한국콘때의 알록달록 엄지공주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 좀더 금은 칠이 확실해져서 정말 보석같아졌다. 일단 제 맘속엔 캐치미가 다 했자나요(단호)
금붕어 코스프레를 하랬더니
뇌가 정말 붕어같아져서
깨알같은 기억 따위 솜사탕처럼
날려버린 것 쯤은 잊어주세요(강요)
사이타마는 객석 규모가 기본 2만명을 넘는 대규모 공연장으로, 500레벨까지 꽉 채우면 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완전히 꽉 채운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붕끝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엄청나다. 이떻게든 단 하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금새 뭉클해지기도 하고. 가장 큰 공연장을 메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건 든든하다못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외국사람인 우리 애들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을까, 싶다가도 나같은 사람이 만명 이만명이 있으니까 이렇게 모이는 거겠지, 라는 생각을 하곤 금새 피식 웃게 된다.
팬들의 여러가지 이벤트를 물론 좋아하는 소녀들이지만, 유독 콘서트마다 보고싶어하는 것이 "파도타기"인 것 같다. 일본 콘서트는 입장할 때 무조건 공식야광봉을 나눠주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은 크기의 똑같은 색깔을 내는 응원봉을 들 수 있어서, 공연 시작 직전 야광봉만 켜졌을 때의 그 장관이 너무 아름답게 빛난다. 이번에도 넓은 공연장만큼 넓은 핑크색 파도가 넘실거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고작 이렇게 야광봉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 정도뿐일진 몰라도, 모두가 같이 들면,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매순간 우리가 소녀들을 움직였고, 소녀들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별별별
- 151224 Phantasia Tour in Saitama
밖에서는 푸른 비가, 안에서는 별 비가 내렸다.
소녀들 콘서트에는 늘 장미나 싸인공이나 사탕 등을 던지던 선물타임이 있었는데 이번 판타시아 투어의 선물은 겨울 시즌에 맞춰 싸인이 된 스티로폼 별이었다. 언젠가 싸인이 된 비행기를 날린 적이 있었는데(그러고보니 그 때도 유리싸인본을 잡았던 것 같다) 이번엔 별이라니, 좀 신선한데? 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하얀 별이 눈꽃처럼 팔랑팔랑 쏟아져내렸다. 눈이 오지 않는 크리스마스였지만 이걸로 눈 본셈 쳐도 될 것 같은 장관이었다. 사진을 찍지못해 아쉬웠지만 그 풍경은 기억 속에 고이고이 남겨두는걸로. 공기의 흐름에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중간쯤 히터의 강한 공기에 의해 각도를 꺾어서 다른 곳으로 휘잉~ 날아가버리는 통에 저걸 잡아야지, 했다가도 빈손이 되는 관객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위치에 갑자기 하나가 날아와서 슥, 하고 점프를 해서 잡았다. 돈도 아닌데, 뭘 그렇게 열심히 잡아? 라고 할지 몰라도 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선물인걸.
별별별 별만큼 사랑해 왔던거야
너를 찾아 저 멀리서
사실 나는 너를 보러간 것 자체가 선물이었지만 말이야.
산타 복장을 하고 나타난 첫눈에 무대가 우리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겨울에 듣는 첫눈에 무대는 단연코 최고다. 곁에 잇는걸 이제 알았으니, 바보처럼 외로워하지 않겠지 이젠. 난 너의 까만 머리도 좋지만 금발도 블론디도 빨간 머리도, 어떤 모습을 해도 늘 좋았어, 알고 있지? 첫눈에 때는 서울콘에서는 하지 않았던 썰매 곤돌라를 타고 객석 전체를 돌며 인사를 하고 선물을 던졌다. 너네 그러기 있기 없기?어?..ㅠㅠ 처음에 말했던대로 "내가 볼 수 없는 너의 모습을 보러(질투할거니까?ㅋㅋㅋ)" 온다고 했지.
안녕, 우리는 이브의 밤, 푸른 눈꽃 같은 유리별과 파니별을 만났다.
선물, 고마워.
indestructible
- 151224 Phantasia Tour in Saitama
あなた無しでは今この私はなかったよ
너 없이는 지금의 나는 없었어
원형의 무대가 조금씩 돌아가면서, 모든 방향의 팬들을 향해 소녀들이 노래를 불렀다.
처음 콘서트 투어에서 이 곡을 들었을 때, 가사도 모르는 상태로 가장 처음 멜로디만 귀에 울려퍼졌던 그 때에도, 분명 마음이 왠지 먹먹하게 울리는 멜로디였다. indestructible이라는 단어와 간결한 가사의 전달로만 이루어진 영상.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첫 쇼케이스부터 의외로 성공적인 데뷔와 많은 관심, 매년 끊임없이 이어온 투어. 수많은 팬들과의 만남. 핑크색 물결. "끊어지지않는 인연"이라는 말을 믿으며 4년을, 이렇게 단단하게 이어온 무대의 지난날들. 언제나 보고싶으면 볼 수 있고 듣고 싶으면 들을 수 있는 간격 속에서 살아와 준 소녀들은 그 시간 속에서 많이 울었고 많이 지쳤고 많이 힘들어했고 매순간이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지만,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듣고 춤을 췄다. 어쩌면 소녀들의 시간은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마음만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던게 아닐까.
언젠가 수영이가, 하이힐을 신고 인사를 하려면 무게중심을 놓쳐 앞으로 고꾸라질 수도 있는데 모두가 손을 잡고 버텨주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소녀들은 넘어질듯 끊어질듯 위태롭게 시간을 버텼지만 모두가 손을 잡고 노래를 하는 그 무대에서만큼은 넘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분명, 지켰던 거라고 문득 깨달았다. 첫 일본투어를 하던 때의 유난히 긴장을 하던 소녀들이 기억나고, 두번째 투어에서 일본어 멘트를 조금씩 할 수 있게된 소녀들이 기억나고, 세번째 투어에서 통역을 믿고 깨알같이 멘트를 날리며 놀던 소녀들도 기억난다. 관객이 자란만큼 소녀들도 자랐고, 관객이 믿고 따라와준만큼 소녀들도 무대에 언제나 있었던 것 같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겠지. 어쩌면 수없이 많은 시간을 지나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나진 않았을까.
소녀들과 다시 만나게 해 준 세계. 너와 나의 공간이 존재하는 세계. 인연의 끈과 만남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 한국콘의 절정이 다만세라면 일본콘의 절정은 indestructible이었다. 베스트 앨범에 수록된, 그야말로 BEST였던 첫 공개의 곡과, 꿋꿋히 의연한 얼굴로 음정을 터지게 만들었던 도쿄돔의 곡과, 많은 순간들을 지나고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의 정규 투어의 곡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했던 걸까 아니면 슬기롭게 헤쳐나왔던걸까.
일행이 누군가 던진 마시멜로우를 받았다. 어쩌다보니 내 손에 쥐어지게 된, 소녀들의 선물.
불에 굽지 않은 생 마시멜로우는 굉장히 질기다. 녹아서 끈적이더라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indestructible한 우리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 (단지 던지기 쉽고 맞아도 위험하지 않은걸 선택하다보니 그랬을 것 같긴 하지만).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헨젤과 그레텔이 던진 조약돌 같은 기분이었다. girls'generation이라는 글자를 따라가면, 과자로 만든 소시의 성이 나타날까.
판타시아.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구분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 환상 같았던 선물, 선물 같았던 일상. 그날밤의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 스페셜 라'이브', 너의 시간 속으로 다'이브'. 또다시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린 언제나 라'이브'.
몹쓸 라임을 끝냈으니 이제 글을 마쳐야겠다.
한줄 요약 : 파니야 읽지마(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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